물속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몸이 무겁다고 느껴지던 어느 날, 거울 앞에 선 저를 보며
문득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턱선은 실종된 지 오래되었고 뱃살은 도저히 숨길 수조차 없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아파온 등 쪽 날갯죽지 통증과 손목 통증은 고질병이 된 지 오래였고,
무엇보다 조금만 걸으면 차오르는 숨에 덜컥 겁이 났습니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걷기, 등산, 요가 영상 따라 하기까지
시도는 몇 번 있었지만,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등산은 힘들고,
손목 관절이 좋지 않으니, 몸을 지탱해야 하는 요가도 안 되고
이런저런 핑계로 번번이 작심삼일로 끝났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물속이라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고,
관절을 부드럽게 풀 수 있고,
심폐 기능을 천천히 키울 수 있으며,
체중 부담을 덜 수 있는 유일한 운동.
수영이야말로 지금의 나에게 가장 안전하고 유연한 운동일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저는 수영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꾸준히 해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주저하지 않고 수영장에 등록을 했고,
다음 날 아침,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수영장으로 향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의 새로운 루틴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요한 물속, 나만의 공간
물속은 조용했습니다.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고,
오직 제 호흡과 움직임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공간.
수면 아래로 잠수할 때마다
마치 세상의 소리를 껐다가 다시 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 수영을 시작했을 때는 쉽지 않았습니다.
보기엔 쉬워 보였지만
물에 떠 있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팔과 다리는 따로 놀았고,
호흡을 하지 못해 죽음의 공포를 느껴보기도 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서 헉헉 대기도 하면서,
수영장의 물은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모릅니다.
집에 오면 거의 녹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꾸준히 연습한 결과
수영 실력뿐만 아니라
조금씩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달라지니, 마음도 가벼워졌습니다
무거웠던 어깨가 가벼워졌고,
등과 허리의 뻣뻣함도 덜해졌습니다.
이젠 호흡도 안정이 되면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서
헐떡이던 예전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릎에 부담이 가지 않으면서도
전신을 사용하는 유일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수영은 지금의 제 몸 상태에 딱 맞는 운동이었습니다.
호흡에 집중하며 물속을 천천히 움직이는 그 시간은
마치 명상처럼 마음을 정돈해 줍니다.
한 번의 호흡, 한 번의 스트로크,
리듬감 있는 움직임은
어지럽던 생각을 잠시 멈추게 하고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맑아지게 해 줍니다.
수영이 하루를 일으켜 세워줍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수영장에 간다는 건
저에게 하루의 기준점을 만들어줍니다.
운동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시는 달콤한 초콜릿 맛 단백질 셰이크가
하루의 보상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전날 밤에도 “내일 수영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늦게까지 깨어 있지 않게 되었고,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식사 시간도 더 규칙적으로 되었고,
잠도 더 깊고 편안하게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루가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위해 보낸 시간'으로
채워진다는 점이 참 다행스럽습니다.
오늘도 나는 수영장으로 출근합니다
수영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저를 다시 살게 하는 루틴이 되었습니다.
퇴직 후 어디에도 속하지 않게 된 시간 속에서
수영장이라는 작은 일상 속 ‘출근지’를 갖게 된 것은
지금 제 삶에 가장 큰 질서이자 안도감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몸매도 아니고,
어디에 기록할 기록 지표도 없지만,
그 한 시간 동안 저는
나를 챙기고, 나를 회복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퇴직 후에도 저는
이렇게 저만의 방식으로 ‘출근’을 합니다.
수영장으로요.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던 시간은 끝났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한 시간표를 스스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뿌듯하고, 조금은 단단하게 느껴집니다.
물속에서 흐르는 나의 리듬처럼,
퇴직 후의 시간도
다시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흐르고 있습니다.